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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령이 되면서

   

뉴질랜드를 최초로 발견한건 유럽인은 네덜란드인일지 모르지만, 뉴질랜드를 점령한 영국인이었다.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늘어나고 원주민인 마오리 수는 점점 줄어들면서 19세기와 20세기 전반부에는 뉴질랜드 전체적으로 영국 문화가 지배하게 됐다.

그러나, 2 세계대전 이후, 뉴질랜드는 점점 자신만의 독특한 국가의 정체성을 찾으며 뉴질랜드 문화를 만들어가게 된다.


초기의 방문객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발견한 유럽인은 네덜란드의 탐험가인 아벨 타스만 이었습니다. 당시 남쪽 대륙 '그레이트 사우스 랜드'라는 곳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자원이 많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아벨 타스만은 바로 곳을 찾아서 모험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1642 남섬의 웨스트 코스트를 만나게 됩니다.

첫번째 접촉

1642년에 처음으로 뉴질랜드를 발견한 아벨 타스만은 땅을 '스테이튼 랜드' 명명하고 홀란드(네덜란드) 합병시켰습니다.(후에 네덜란드의 지도 제작자들에 의해서 '뉴질랜드' 바뀌었음) 뉴질랜드의 웨스트 코스트를 따라 계속 항해하면서, 아벨 타스만이 마오리족을 처음으로 만난것은, 남섬의 꼭대기에 위치한, 지금은 골든 베이로 불리는 곳이었습니다.두개의 와카(카누) 가득 타고 있던 마오리족들이 아벨 타스만의 배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벨 타스만 보낸 작은 보트의 선원들이 카누에 부딪히면서 여러가지 오해들을 야기시켜, 작은 충돌이 일어나면서 타스만의 선원 네명이 죽는 사태에 이르게 됐습니다.

얻은 없는 모험

아벨 타스만은 한번도 뉴질랜드 땅을 밟지 않았으며, 웨스트 코스트를 따라 항해한 몇개의 태평양 섬들을 둘러보기만 하고 더취 이스트 인디(현재의 인도네시아) 있는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 돌아갔습니다. 보물이나 천연자원이 가득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타스만의 고용주인 네덜란드의 동인디아회사에서 성공적이지 못한 항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죠.

비너스의 질투

제임스 선장은 비너스(금성)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찰하도록 타히티로 보내어졌으며, 또한 남쪽의 대양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던 거대한 남쪽 대륙을 찾아야 하는 임무도 있었습니다. 항해 선장의 선실 사환이었던 어린 소년 닉이 1769년에 기스본 가까이에 위치한 조각의 땅을 발견했는데, 곳이 현재 어린 닉의 머리(Young Nick's Head)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훌륭한 표본들

선장은 성공적으로 뉴질랜드를 주항했으며 지도를 작성했습니다. 그의 식물학자들과 다른 전문가들이 그의 함선 인데버 (the Endeavour) 같이 승선하였으며, 뉴질랜드의 식물군과 동물군, 그리고 마오리 원주민에 대한 상당한 자료들을 수집하였습니다. 선장은 1779년에 하와이의 해변에서 살해되기 전까지, 두번 뉴질랜드를 찾았습니다.


 

와카탄 벽화 - click for more.
와카탄의 벽화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 유럽계(파케하) 공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정착자들

1840 이전에는 주로 고래잡이와 물개잡이, 그리고 선교사들만이 뉴질랜드에 왔습니다.이들 정착자들은 특히 해변 지역에서 마오리족과 상당한 접촉을 해왔습니다. 마오리족과 파케하(유럽인) 광범위한 교역을 하였으며, 몇몇 유럽인들은 마오리족들 사이에서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무기 거래

1840 이전에, 뉴질랜드에는 2천명의 파케하가 있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살았습니다. 시기에는 마오리 부족간의 충돌이 잦았고, 이에따라 마오리족이 파케하로부터 사들인 총의 유입으로 인하여 전쟁은 더욱 위험해졌습니다. 무기의 유입과 파케하가 옮겨온 질병으로 인하여 결국은 마오리 인구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들의 수는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의 기류

1840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뉴질랜드의 구조적인 식민지 개척은 대부분 에드워드 기본 웨이크필드(Edward Gibbon Wakefield) 아이디어에 의해 기초되었으며, 그는 식민지의 개척은 영국사회의 구조를 모델로 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많은 뉴질랜드의 도시들과 마을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설립되고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문명화를 추진하고, 적은 수의 농부들이 자신들의 땅을 개간하는 자급자족적 문화를 형성한 동시에, 원주민들과 영국인이 함께 평화로이 있도록 계획되어 졌습니다.

권리에 대한 분쟁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땅을 요구함에 따라 마오리족과 영국인 사이에 분쟁이 증가하게 됐습니다. 와이탕이 조약의 애매 모호한 해석과 지지의 결여로 인하여 불만이 증가했고, 사소한 충돌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과, 1840년대 중반에 북섬에서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다른 지역들에서는 1860년대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마오리족의 감소

땅에대한 전쟁 동안 마오리족은 많은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북섬의 오해와이 (Ohaewai Pa) 방어같은 몇몇 전쟁에서 마오리족의 전술은 상당히 교묘함을 보여주었고, 종종 유럽인의 전술보다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 군대는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숫자의 힘에 의해 뉴질랜드의 전쟁은 마오리족들의 패배로 끝이 났습니다. 머지않아, 정부는 와이카토와 타라나키의 우수한 땅들을 포함하여 마오리족 땅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많은 땅의 손실과 계속적인 질병으로 인해 마오리족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하여, 1900년에는 겨우 4만여명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식민지의 예속

19세기와 20세기의 대부분의 시기를 통하여 영국의 '조국' 뉴질랜드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정부의 행정, 교육 그리고 문화가 영국을 모델로 하여 설립되었습니다. 뉴질랜드의 군대는 보어전쟁과 두차례의 세계전쟁에서 싸웠으며 상당한 수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당시 뉴질랜드 수상이었던 마이클 세비지는 1939년에 영국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이 가는 곳은 우리도 간다. 영국이 대항하는 곳이면 우리도 대항한다.'

새로운 동맹국

세계 2 대전후에는 영국과의 문화적인 예속관계가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뉴질랜드 정부는 미국을 그들의 주요 동맹국으로서 그리고 보호자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뉴질랜드는 SEATO (South-East Asia Treaty Organisation) 가입하였으며, ANZUS (Australia, New Zealand, and United States)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뉴질랜드 군대는 또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과 함께 싸우기도했습니다.

공화국으로의 발돋움?

뉴질랜드가 여전히 영국의 유산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현재는 자신만의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연방의 멤버이면서, 미국과의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뉴질랜드는 현재 교역과 외교에 대한 아주 독립적인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1980년대 중반에 무핵지대가 되었으며, 군대 역시 기본적으로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오늘날에는, 보수적인 정치인들조차 뉴질랜드가 공화국이 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으로 이야기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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